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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갑사
작성일:2010.07.16
조회수: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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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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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甲寺)의 역사(歷史)와 사적(寺蹟)
갑사는 임란(壬亂)때 승병장, 서산,사명,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찰로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이래, 풍부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습니다,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문화의 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千年古刹)로써,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元年,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후의 통일신라시기의 일이었습니다.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갑사는 이때 신라 화엄종 10대사찰의 하나로 번창 하였습니다.
영조 14년(1738년)에 건립된 경내의 표충원은 임진란 때 대표적인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갑사는 조선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수년이 지난 선조 37년(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효종(孝宗) 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중수하였습니다. 이어 고종(高宗)12년인 1875년에도 사승(寺僧)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堂)이 신축되었습니다.
현재의 갑사는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 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 (寂?堂)인 요사(寮舍)가 있습니다, 이외 종각(鐘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 하나의 요사가 있는데, 이 요사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堂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위치는 아님을 나타냅니다, 원사당지 대형의 이동은 임난(任難)후의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외에 주요문화재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 배살입상(菩薩立像), 사적비(史蹟碑),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경역(寺境域) 주변에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신흥암(新興庵) 등 5개의 부속암(附屬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지방문화재중 중요한 것 몇 개만 기술합니다.
갑사대웅전은 지방문화재 제105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갑사의 본전(本殿)으로 정유재란 (丁酉再亂)때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선조(宣祖) 37년(1604년)에 중건 하였습니다. 원래의 대웅전은 현재 대적전(大寂殿)이 있는 부근으로 보이며, 중건시 이건(移建)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자연석 주초(柱礎)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기둥간격은 가운데 3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아 공포를 2구씩 배치하고, 협칸에는 1구씩 배치하였습니다. 공포는 내(內).외삼출목(外三出目)으로 쇠서는 완만하게 휘어 있고 대체로 조선시대 중기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초각(草刻)도 눈에 띔니다, 내부는 우물천장에 닫집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석가여래불상(釋迦如來佛像)을 안치(安置)하고 있습니다.
갑사의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은 (지방문화재 제50호) 갑사 동쪽 계곡의 약 100미터 지점에 자연암석으로 된 동굴 안에 남쪽을 향해 전체 높이 141㎝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원래 갑사 뒷산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전해집ㄴ지다. 머리는 육계(肉界)가 크며, 백호(白毫)가 뚜렷하고 얼굴은 좀 길며 눈은 가늘고 입은 다물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에 걸쳐 좌우로 무릅 부분까지 늘어졌고, 가슴 앞 옷은 반원형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오른손은 들어 가슴 부분에서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어 약사여래임을 보여줍니다.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봅니다.
갑사 철당간 및 지주(鐵幢竿支柱 보물 제256호)의 철당간과 지주는
현재 기단부(基壇部)의 대석(臺石)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고, 장대한
두 개의 장방형(長方形)의 기단석만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노출된 두 개의 기단석에는 각면에 안상(眼象)을 음각하여 장식하였
는데 그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의 안장 장식 기법과 같습니다. 동서로
맞서 있는 두 개의 지주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지주로서 맨 위
의 정상부는 평평한데 바깥쪽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죽여 활모
양으로 그리며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간지주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이라는 구멍이 윗부분 한
군데에 장치되어 있는데, 이곳에다 철제당간의 다섯 마디 철통을 철띠
로 세 번 돌려 고정시켰습니다. 철제당간의 직경은 50㎝로 현재 철통
24개를 연결하여 세워져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래는 28개의
철통이었으나, 대한제국말기인 고종(高宗) 30년(1893) 7월 5일에 네
마디가 부러져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초기
인 문무왕 20년(680)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
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당간지주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외에도 갑사 동종(銅鐘 보물 제478호), 갑사부도(甲寺浮屠 보물
제257호), 갑사(甲寺) 사적비(寺蹟碑), 대적전(大寂殿 지방문화재 제1
06호),등의 보물급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조선시대의 숭유배불(崇儒排佛)로 인하여 많은 스님들이
산속으로 은둔하여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중생들에게 전하려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 사상을 널리 포교함으로서 오늘 날의 불교
가 융성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이러한 스님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전당을 두루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역사적 가치 및 문화재가 거의 절에
서 발현 됐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불자로서의 신앙심을 더욱 높여 부
처의 대자대비의 사상을 실천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